정치 사회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가 참배한 윤이상은 누구인가?

감투봉 2017. 7. 25. 21:21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가 참배한 윤이상은 누구인가?

⊙ “그의 얼굴에서 ‘덕(德)’이나 ‘인(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범죄형’적인 인상까지 풍겼다”(윤이상의 박정희에 대한 평)
⊙ “훌륭하고 당당한 풍채, 사람을 위압하지 않는 편안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웃음 어린 밝은 표정, 큰 인물이 가지는 무게, 그러면서 부드러운 덕성과 자비심, 예술적인 섬세함과 감각”(이수자의 김일성에 대한 평)
⊙ 김일성, “윤이상은 민족의 재간둥이”… 윤이상음악연구소 설립, 집 하사, 김정일은 피바다예술단원을 며느리로 삼게 해줘
⊙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 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윤이상 부부가 김일성 사후 보낸 조전)
⊙ 1959년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과 접촉하면서 자가용 굴려, 주서독 한국대사관에도 보조금 요청
⊙ “동백림사건의 원점은 윤이상에서 시작”(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
⊙ 대법원, 윤이상이 의장으로 있던 범민련 해외본부를 이적단체로 판결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윤 선생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 선생의 마음도 풀리시길 바란다.”
 
  7월 5일 독일 방문길에 베를린 교외 스판다우에 있는 작곡가 윤이상(尹伊桑・1917~1995)의 묘를 참배한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가 한 말이다. 윤이상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후에도 친북(親北) 행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재독(在獨) 학자 오길남씨는 윤이상이 자신에게 입북(入北)을 권유했고 북한을 탈출한 후 북한에 남은 가족의 구명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는 이를 외면했다고 주장했다.
 
 
  1. 윤이상과 동백림사건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는 독일 방문 중이던 지난 7월 5일 윤이상의 무덤을 참배하고, 경남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었다. 사진=청와대
  윤이상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이다. 윤이상은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연행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그는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3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아내 이수자는 징역 5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의 구명을 위해 세계 각국의 음악인들이 나섰다. 독일(서독)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작전이 독일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높아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特赦) 형태로 윤씨를 석방, 독일로 돌려보냈다.
 
 
  1959년부터 북한과 접촉
 
  윤이상의 주장에 의하면 그가 북한과 접촉하게 된 것은 1959년경이었다. 그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설명한 경위를 요약하면 이렇다.
 
  〈1958년 여름 내가 처음으로 다름슈타트의 국제음악하기강습회에 참가했을 때, 우리는 교육대학의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급사를 하고 있던 소녀는 동독에서 온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코리아에서”라고 말했지요. “남에서입니까, 북에서입니까?”라고 그녀가 다시 물었지요. 그녀가 말한 바로는 자기는 동독에서 왔는데, 거기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청년 시절의 친구 최(崔)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함께 학교에 다녔고,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그 후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바 있는 그 최를 말입니다. 그는 당시부터 이미 열렬한 공산주의자여서 그 때문에 우리는 종종 논쟁을 했었지요. 그는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간 이후,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며 지휘도 했습니다. (중략)
 
  동독에서 이 소녀를 만났을 때, 나는 즉석에서 그녀를 통해 북한의 친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꼬박 1년간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동베를린에 사는 어떤 북한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행방불명된 친구로부터 서울의 가족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맡아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지러 오시기 바란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중략) 물론 나는 곧 동베를린으로 편지를 가지러 갔지요. 나는 그 편지를 가능한 한 일찍, 오랫동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의 부인(최의 부인-기자 주)에게 보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북한 사람을 방문하는 것이 어떠한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북분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지요.〉(《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한울, 1988년)
 
  윤이상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나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친구) 최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의 자식들이 서울로부터 오기 위한 여비였다”고 주장했다. 윤이상은 1963년 4월 아내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의 소감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메이데이를 그 땅에서 보냈습니다. 이 축전 때에 나는 동베를린의 대사관에서 영화로 보았을 때에는 조작된 광경이라고 생각하던 광경을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김일성 주석이 와서 말하면 거대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단지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을 뿐인데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민중은 전쟁 후 오랫동안 굶주리고 빈곤하여 잠을 잘 다락방도 없었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모든 것을 지도하여 그들이 더 이상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했으며 집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옛날의 오두막집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고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했으며 또 개인적인 위광을 과시했습니다.〉(《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이와 관련, 국가안전기획부는 1992년 “윤이상은 1963년 아내와 함께 입북, 간첩교육을 받고 독일로 귀환,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정길을 독일로 유인해 북한 공작원에게 인계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문화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북한과 접촉하면서부터 윤이상의 삶은 달라졌다. 후일 동백림간첩사건의 단서를 제공한 임석진(林錫珍) 명지대 명예교수의 회고다.
 
 
  자가용 타고 북한대사관으로
 
  〈1959년 6월 하순, 유학생 조명훈이 임석진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구수한 전라도 억양에 술을 좋아했던 조명훈은 1988년 5월 북한 방문에 이어 한국에 들어와 북한 방문기를 펴낸 바 있으며, 이때 북한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 독일 교민 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임석진을 만난 조명훈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하루는 윤이상 선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나에게 오라고 전화를 했어. 자가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 어려운 형편에 차를 어떻게 샀을까 궁금했지.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더라고. 베를린에 갔더니 날 태우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차를 세웠는데 거기가 동베를린 도르데아슈트라세 4번지의 북한대사관이야. 윤 선생은 날더러 ‘조군, 여기가 북한대사관인데, 이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거야. 같이 들어가세’ 하고 날 끌고 들어갔지. 조금 있다가 윤 선생은 가 버리고 나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거기 대접 한번 후했어.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까. 만나보니 다 같은 우리 민족이더라고. 윤 선생이 생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긴 윤 선생은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데 차도 사준 것 같았어. 자네도 한 번 가봐.”
 
  당시 독일 교민 사회에서 한국 유학생이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꿈 같은 시절이었다. 조명훈은 북한대사관 주소를 적어 임석진에게 건네주었다.〉(조갑제, 《박정희》 9권)
 
  이 주장대로라면 윤이상이 북한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시점은 윤씨의 주장보다는 조금 빠르다. 북한과 접촉하자마자 자가용을 마련하고, 유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북한대사관과 접촉시키는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다.
 
  임석진 교수는 북으로 간 수양어머니 김씨와 아들 윤기봉의 소식을 알고 싶어 북한대사관에 편지를 썼다. 이를 시작으로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한 임석진 교수는 1961년과 1966년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윤이상이 월북한 친구 소식을 알기 위해 북한대사관과 접촉하고 북한을 방문하게 된 것과 닮은꼴이었다.
 
 
  윤이상, “임석진은 배신자”
 
동백림사건 당시 법정에서 증언하는 임석진 교수.
  임석진 교수의 이름은 동백림사건에 대한 윤이상의 발언에도 등장한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대중입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어서, 사람들은 박이 패할지도 모른다고들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박은 자신의 정책이 옳다는 것을, 즉 반역자에게는 혼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1965년에 대규모의 일제검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박은 비합법정당인 ‘인민혁명당’이라는 공산주의자 지하운동을 적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었지만, 박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중략) 하이델베르크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신문의 어느 저널리스트가 체코와 한국의 농구경기의 보도 기자로서 프라하로 간 것입니다. 그는 비자가 없는 채로 갔습니다. 아마 그는 체코에는 비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든지, 아니면 신임받는 저널리스트였으므로 비자가 없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는 공항에서 체포되어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한국의 신문은 그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를 수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와 접촉이 있었던 독일 주재 한국인들을 모두 심문했습니다. 나도 심문을 받은 사람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국인 세미나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런 일에 대해 누가 정확히 알겠습니까?
 
  당시에 임석진이라는 또 한 사람의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르도노 밑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동포에 대해 염탐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그는 KCIA(중앙정보부)를 위해 일하면서도, 동시에 북조선의 스파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혹은 그가 종종 북조선으로 가자고 했고 또 잠깐씩 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일하기도 했던 점을 두고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에 대해 꽤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중에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1967년 초에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그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습니다. (중략)
 
  그 사람만이 아니라 동생도, 부인도, 여동생들도 북조선을 왕래했으니 가족 전원이 북조선을 위해 일했든가, 아니라면 한국을 위해 일했든가, 그것도 아니면 전원이 이중간첩 활동을 했든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임은 재판에서 선서를 하고도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위증을 한 셈이죠. 그는 나 외에 다른 친구들에 대해서도 배신했습니다.〉(《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동백림사건의 원점은 윤이상”
 
동백림사건 3회 공판에서 재판장의 허가를 받고 물을 마시는 윤이상. 뒷줄에 윤씨의 아내 이수자(맨 오른쪽)와 윤씨의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정길(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보인다.
  임석진 교수의 주장은 다르다. 임석진 교수는 두 차례 북한에 가보고 난 후 환멸을 느끼고 점차 발을 빼기 시작했다. 윤이상이 언급한 ‘하이델베르크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신문의 어느 저널리스트’의 실종사건은 이때 일어났다. 그 저널리스트는 《조선일보》의 이기양 기자였다. 이 기자도 임 교수의 소개로 북한대사관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임석진 교수는 이기양 기자의 실종을 자신에 대한 북한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고민하던 임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 알고 지내던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씨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임 교수는 박 대통령에게 독일 등 유럽 사회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의 실태에 대해 털어놓았다. 동백림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임 교수가 윤이상의 눈에 ‘이중간첩’ ‘배신자’로 보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동백림사건의 원점은 윤이상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바로 첫 통로를 연 사람이었고, 조명훈도 이 사람 밑에 있었으며 나도 거기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윤이상은 1956년에 파리에 유학 와 이듬해엔 베를린으로 유학지를 옮겨 버렸습니다. 북한대사관이 지척이었지요. 프랑스의 이응로 화백은 부인 때문에 순진하게 북한에 말려든 경우였습니다.
 
  그때 독일에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은 가난했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경제 사정이 좋아 유학생이 찾아가면 술도 대접하고 돌아올 때면 생활에 보태 쓰라며 돈도 집어주는 겁니다. 당시 100달러면 우리 같은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큰돈이었으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거의 결정적이었습니다.〉(조갑제, 《박정희》 9권)
 
 
  윤이상, 주독대사관 찾아가 ‘보조금’ 요청
 
  흥미로운 것은 윤이상이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과 접촉하고 있던 무렵, 독일 주재 대한민국대사관을 찾아가서도 ‘보조금’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윤석헌 전 주불대사의 회고록 《먼 길을 후회 없이》(동아일보사, 1993년)에 나오는 얘기다.
 
  〈(1961년) 하루는 윤이상이라는 교포가 찾아와서 자기를 작곡가라고 소개한 후 서독 정부는 음악가·화가 등 예술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문화·예술을 장려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국 정부는 예술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나는 그에 대하여 한국은 6·25전쟁으로 국토가 많이 파괴되고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전 국민이 최저 생활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UN 기타 우방의 구호와 원조에 의존하는 형편이라고 말하고, 정부가 지금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으니 우리 경제가 나아지면 국민이 세금도 더 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돈으로 문화발전에도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는 전 국민이 참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독정부와 비교를 하였으나 서독은 패전 후 전 국민이 이를 악물고 오직 경제 재건과 발전을 위하여 근검절약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냐, 우리도 독일의 이런 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독일은 6·25전쟁 같은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덮어놓고 독일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간곡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며 물러갔다.〉
 
 
  2. 윤이상과 범민련 해외본부
 
  윤이상은 1969년 독일로 돌아간 후 이른바 민주화운동 내지 통일운동에 투신했다. 1977년에는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활동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서의 활동이다. 그는 1990년 12월 16일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 선출되어 4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남과 북, 해외 대표들이 만든 전 민족적인 민간통일기구’라는 것이 윤이상 부부의 주장이다. 윤이상은 해외본부 의장으로 선출된 후인 이듬해 1월 20일 〈일천만 해외동포에게 드립니다〉라는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략) 우리 범민련은 제3세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단체가 아니며 순수한 통일 지향의 ‘민족대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정치제도를 옹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쪽 정부와의 대립을 피하며 오히려 필요에 따라서는 서로 화합하고 지혜와 공론을 제공하는 데 노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양쪽 정부 간의 어떠한 효과적인 교량 역할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란 견지에서 볼 때 분단된 양쪽의 정부가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의 운동을 파괴하려 하거나 우리의 의견을 불문에 부칠 경우 그 정부는 민족 대중의 소리를 배반함으로써 역사에 큰 과오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면 새로운 난관을 스스로가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중략)
 
  지금 우리의 할 일은 양 정부의 어느 쪽이 비현실적이고 반통일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가를 꿰뚫어 보는 것이고 거기에 선의로써 보아 문제를 푸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군사적인 긴장 완화가 제도적으로 조성되어야 하며 반통일적인 악법을 개선하고 통일을 부르짖던 인사들을 석방하고 민족화해의 터전부터 먼저 마련하여야 합니다. (후략)〉
 
  이 범민련 해외본부에 대해 대법원은 이적(利敵)단체로 규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대법원 1994. 5. 24. 선고 94도 930판결).
 
  윤이상은 건강상의 이유로 1994년 범민련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그해 대법원에서 범민련 해외본부를 이적단체라고 판결한 것은 윤씨가 사임하기 전 범민련 해외본부의 활동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다. 윤씨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3. 윤이상 부부가 본 박정희와 김일성
 
  윤이상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을 모두 만났던 사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1917년생 동갑이다. 그의 친구였던 서정귀(제4・5대 국회의원) 전 호남정유 사장, 김종길 변호사 등은 박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이기도 했다.
 
  1963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윤이상은 한인회 회장 자격으로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환영사도 했다. 이때의 일을 윤씨는 〈나와 박정희〉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박정희의 공 인정하지 않을 것”
 
1964년 12월 서독 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윤이상은 서독 방문 당시 박 대통령의 모습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전략) 후에 역사는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결산할 날이 올 것이다. 그 결과 만일 공이 죄보다 크다고 판단한다 하더라도 나 개인은 절대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공이라면 소위 ‘경제발전’을 두고 말할 것인데, 그것에 십분 양보한다 치더라도 그가 19년 동안 짓밟은 민족도의의 황폐화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중략) 1964년 박정희는 서독을 공식 방문하였다. 하루 저녁 서독 대통령 주최의 초청연이 성대히 베풀어졌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서독의 언론이나 사회 여론은 냉담했으나, 환영연의 광경으로 보아서는 서독 정부가 한국과 얼마나 장사하고 싶어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서독의 저명한 정계와 경제계 인사들은 대부분 모였다는 인상이었다. (중략)
 
  뤼프케 대통령이 나를 좌중에 소개시켰다. 박 대통령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박과는 반대로 육영수 여사는 나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략)
 
  나는 박을 사이에 두고 뤼프케 대통령하고만 얘기를 주고받았다. 뤼프케는 음악에 관해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좀 전에 연주된 나의 곡에 관해 상당한 이해력으로 분석적인 의견을 펴놓았다. (중략) 그래서 약 45분 동안이나 나와의 대화가 중단됐다가도 계속되곤 하였다. 그동안 박은 한마디도 입 밖에 말을 내지 않았다. (중략)
 
 
  “박정희는 어둡고 ‘범죄형’적인 인상”
 
  박 대통령 일행은 뮌헨을 방문하였다. 그 시기에 나는 공교롭게도 서독한인회 회장이었으므로 수일 전 쾰른시에서 교포들의 환영회가 있었고 나는 교민들을 대표하여 하기 싫은 환영사를 하였다. (중략)
 
  박은 외화를 벌기 위하여 한국에서 독일 광산촌에 일하러 온 광부들 앞에서 “과부의 서러움은 과부가 안다” 하며 대통령이 말답지 않은 인용말을 써서 교민들에게서 빈축을 샀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가난하니 이런 외국에 노동하러 온 서러움을 내가 안다는 뜻이었겠지만….
 
  뒤에서 내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을 박도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공적으로 세 번이나 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 다 그는 나에게 미소도, 한마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뤼프케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그를 2미터 앞에 두고 관찰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의 얼굴에서 ‘덕(德)’이나 ‘인(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둡고 강직하고 치밀하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형’적인 인상까지 풍겼다. 나는 왜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박에게 이런 헛수고를 하였던가?
 
  그때 나는 나에게 타일렀다.
 
  “국내에서야 어쨌든 외국에 나온 바에야 나는 박 개인을 위한 것보다 내 나라나 내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어느 하잘것없는 나라의 대통령 앞에서 최경례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하략)〉
 
 
  이수자, “박정희는 총칼 들고 나라 훔쳐”
 
  윤이상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의 민중은, 특히 박이 일제시대에 일본의 황제인 천황의 추종자였고 오카모또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장교로서 일본군에 가담하여 한국과 싸웠던 일을 잊고 있지 않습니다. 박과 같이 일본화된 사람이 일본과 조약을 맺는다면, 그것은 일본에 대해 주체적이기는커녕 일본에는 이익이 한국 민족에게는 불이익이 가해질 것은 명백합니다. 그 조약은 실제로 그 후, 그러한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지요. 일본의 기업이 한국에 진출하여 저임금에 파업권도 없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를 값싸게 고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민족이 자기 민족을 희생시켜 부유해졌고, 우리는 식민지 상태가 다시 전개된 것입니다.〉
 
  윤이상 부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경멸과 폄하로 일관하고 있다. 윤이상은 ‘범죄형’적인 인상 운운했고, 그의 아내 이수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라를 훔쳤다’고 했다. 윤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이라는 호칭조차 아깝다는 듯 ‘박’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런 윤씨와 이씨가 김일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하는지를 보기로 하자. 먼저 1963년 4월 북한 방문에 대한 윤씨의 회고다.
 
 
  김일성과의 첫 만남
 
  윤씨의 아내 이수자는 김일성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김 주석을 첫 대면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내가 북에 와서 김 주석에 대한 필름을 보며 일본 조총련에서 오는 사람들이 김 주석을 대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부르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의 한생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러한 감회는 어디서 왔을까? 오랫동안 조국과 떨어져 이국의 하늘 밑에서 살다가 찾아온 망향자의 서러움에서일까, 아니면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꿋꿋이 나가는 김 주석의 모습에 감격해서일까?
 
  훌륭하고 당당한 풍채, 사람을 위압하지 않는 편안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웃음 어린 밝은 표정, 큰 인물이 가지는 무게, 그러면서 부드러운 덕성과 자비심, 예술적인 섬세함과 감각. (물론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자주 접근하면서 발견한 사실이다. 내가 남편과 같이 15년을 두고 한 번씩 접견을 하면서 가까이에서 느낀 사실을 나는 솔직한 심정에서 적기로 했다.)〉(《내 남편 윤이상》)
 
 
  ‘민족의 재간둥이’
 
김정일의 지시로 1993년 윤이상음악연구소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런 윤이상 부부에 대해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각별히 공을 들였다.
 
  〈‘광주여 영원히!’에 이어 해마다 남편의 음악이 북의 국립교향악단에서 연주됐다. 음악회가 거듭될수록 김 주석의 남편에 대한 정은 두터워졌다. 그는 “민족의 재간둥이 윤이상 선생”이라고 매우 다정하게 불렀다. 조선 민족의 재능을 세계에 떨친다 하여 그렇게 불렀으리라.〉
 
  〈우리가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난 뒤 1984년 12월 5일 김정일 비서의 지시에 따라 해외 문화관계 외교관, 국내 문화관계 예술계 명사들, 정부 중진, 기자 등등 참석하에 윤이상음악연구소가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서 화려하게 개관되었다.〉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은 관계 부문 일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윤이상 선생은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 정상의 예술가입니다. 민족의 예술성을 세계에 널리 선양하는 이런 분을 우리는 아껴야 합니다.” 1990년 10월 1일 윤이상음악연구소는 독립, 특수기관으로 하고 그 기구를 확장하도록 김정일 비서의 지시가 내려졌다. 그 지시에 따라 윤이상음악연구실, 민족음악연구실, 외국음악연구실, 작곡연구실 등의 연구집단과 음악잡지와 도서 출판을 위한 편집·출판부서들, 40여 명의 실내관현악단, 통일음악교류 관리 부서 등 150여 명의 규모를 가진 큰 연구소로 발전하였다. (중략)
 
  1991년 김정일 비서의 지시에 따라 북에서는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위하여 훌륭한 건물을 세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연구소는 평양의 가장 중심거리에 15층의 현대건물로 세우라고 하고 건축설계를 했다. 이 건물은 2월 한겨울에 착공하였으며 완공하기까지는 만 2년이 넘게 걸렸다. 이에 투입된 노동력은 군의 젊은 대원들이었는데 그 신속한 건축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 건물 안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음향을 가진 음악연주장을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건축가 몇 사람이 서베를린의 우리 집까지 남편을 찾아왔다. 남편은 그들을 라이프찌히, 드레스덴 등 동독의 이름 있는 연주장 등 여러 곳을 관람시켰다. 마지막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실내악 연주장을 관람시켰다. 여러 연주장을 관람한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들어 한 것이 이 음악홀이었다. 남편은 필하모니와 교섭하여 건축도면을 받았다.
 
  평양으로 돌아간 그들은 600석의 음악회장을 하나의 공간악기와 같이 베를린 필 실내악당보다 모양으로나 음향으로나 더 훌륭하게 지었다. 짓고 나서 보니 모든 음악가들은 거기서 연주하는 것이 꿈인 양 선망의 연주장이 되었다. 1993년 5월 연구소는 정문 높이에 ‘윤이상음악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훌륭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
 
 
  집은 김일성이, 며느리는 김정일이 마련해 줘
 
  〈1993년도 이제 저물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이 해가 저물기 전에 평양에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12월 31일은 북에서 해마다 김 주석을 위한 소년소녀들의 설맞이 놀이의 공연이 하나의 대대적인 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공연에 초대된 남편은 대기실에서 김 주석과 대면하게 되었다.
 
  김 주석은 “왜 이제 왔소?”라고 묻고는 한참 후에 “앓느라고 못 왔지?”라고 말했다. 그 짧은 말 속에는 내가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는가 라는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윤이상 선생 같은 분은 오래 살아야 하오. 민족의 예술성을 세계에 널리 선양하는 이런 분은 민족의 재간둥이요.”
 
  이렇게 민족의 재간둥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김 주석은) 그리고 남편의 건강을 몹시 걱정했다.
 
  “이제 나이도 많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외국서 너무 고생하지 말고 독일에는 한 번씩 얼굴만 내밀고 공기 맑은 조국에서 편히 지내도록 하시오. 전 세계에 민족문화를 넓게 펼치는 이런 재간 있는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합니다.” 평생을 민족을 생각하며 곧은 한길을 걸어왔고 예술로써 민족의 슬기를 높이 선양한 고적하고 병든 노예술가를 극진히 아끼고 대접하는 김 주석의 마음 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을 찾아와도 마음 편히 거처할 집 한 칸 없어서야 되겠느냐 하며 지금의 이 집을 선물로 내려주었다. 북조선의 공민이 아닌 사람에게 평양 교외의 수려한 자연 속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우리가 첫 예이리라 생각한다. 김 주석은 남편이 평양에서 요양할 동안 조석으로 관계 부서에 남편의 건강에 대하여 문의했으며 또한 원기를 얻으라고 몇십 년씩 자란 산삼을 내려보내기도 하였다. (중략) 우리가 평양에 오면 주치의와 간호원이 우리 집에 상주한다.〉
 
  ‘민족의 재간둥이’에게 김정일은 며느리까지 구해주었다.
 
  〈1982년 여름 남편과 나는 아들 우경과 같이 평양으로 향했다. (중략) 북에 가서 동족 속에서 감격한 아들은 장차 외국에서 사는 한 장래의 직업이 될 수 없는 정치학 공부를 계속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꿈꾸던 촬영 공부가 하고 싶다고 해서 평양에 남기로 했다. 2년 동안 영화대학 촬영교수 아래서 열심히 배웠다. (중략)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차피 남쪽에 못 돌아갈 바에야 북에서라도 가정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우리는 희망했다. 주위의 여러분이 색시감을 찾아 노력했다. 여러 날이 걸려도 아들이 소개해 오는 색시감은 마음에 없어 하는 것을 보고받은 김정일 비서는 예술계에서 찾아보라는 허락을 내렸다고 했다. 결국 찾아낸 처녀가 피바다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무용수였다. 함흥이 고향인데 그곳에서 선발되어 평양으로 오게 된 처녀다. 아들은 한눈에 보고 그 미모에 반해 버렸다. 두 번째 볼 때는 약혼이고 세 번째 볼 때는 결혼이었다.〉
 
 
  “우리 민족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
 
김일성과 윤이상의 면담 기록인 《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와 윤이상·이수자 부부가 김일성 사후 보낸 조전들을 모은 《영원한 추억》.
  이런 ‘은혜’를 베풀어준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윤씨 부부의 ‘보은’도 자별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 윤씨 부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이수자의 회고다.
 
  〈북의 강산이 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남편은 곧 조전을 쳤다. 그의 건강상태로는 평양까지의 장거리 비행기 여행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보낸 조전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씨가 김일성-김정일이 베풀어준 ‘은혜’나,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서 남편 윤이상이 발표한 성명 등을 시시콜콜히 기록으로 남긴 것을 생각하면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때 윤이상 부부가 보낸 조전의 내용은 북한 문학예술출판사가 2003년 펴낸 《영원한 추억》이라는 책자에 수록되어 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 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윤씨 부부는 이듬해 7월 8일에는 김일성 사망 1년을 맞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 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령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사의 원리라고는 하지마는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령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년 7월 8일. 리수자〉
 
  윤이상이 죽은 뒤인 1999년 7월 8일에도 이수자는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아- 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떠나신 지 벌써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수령님께서 보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평안을 누리시고 영생불멸하십시오. 우리의 강토를 지켜주시고 민족의 념원인 통일됨을 열어주십시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령전에 큰절을 올립니다. 주체 88년 7월 8일 리수자〉
 
 
  윤이상은 왜 친북(親北)이 되었을까?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2007년 9월 13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다.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자신의 이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을 열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럽에서는 극히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나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였지요.〉
 
  그런 그가 왜 그렇게 친북 일변도의 행태를 보이게 되었을까? 아마도 동백림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윤이상은 1963년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등 북한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박정희나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야박한 평가와는 딴판이다.
 
  윤이상은 왜 대한민국에 대해 그렇게 섭섭한 생각을 품게 되었을까? 단순히 당시 대한민국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임석진 교수의 동생으로 동백림사건과 관련해 옥고를 치렀던 임석훈씨(재독교포)는 10여 년 전 기자를 만났을 때 “동백림사건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나는 대한민국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이래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다.
 
  윤이상이 북한으로 기울게 된 것은 혹시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던 가난한 음악도에 대한 한국과 북한의 태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본 것처럼 대한민국은 외국에 사는 한 가난한 예술가가 요청하는 보조금을 박절하게 거절했다. 윤이상의 눈에 그 나라의 대통령은 자신의 음악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조야(粗野)한 사내였다. 대사관원이고 대통령이고 예술적 감성은 전혀 없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하품(下品)의 인간들이었다. 더욱이 그 대한민국은 자기와 아내를 납치해다가 고문하고 사형을 구형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북한은 달랐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의 인연 때문에 북한을 찾았더니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친구의 자식들을 데려오라며 돈도 주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자동차도 사주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비서’는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그를 칭찬하면서 연구소도, 집도, 며느리도 안겨주었다. 꼭 경제적 혜택이 아니더라도 예술가의 자존심을 한껏 만족시켜 주었다.
 
  김일성은 “윤이상은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 올렸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애국지사”라고 높이 평가했다.(《김일성교시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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