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즐기는데 웬 '국뽕'?.."한국팀 아니라도 꿀잼"
비인기종목 컬링도 열풍…외국선수 실력에 '엄지척'
근육질 '통가오빠' 인기…해외경험 2030 과거와 달라
"스포츠는 '유희' 민족주의 약화…과한 애국심 국뽕"
【서울=뉴시스】이예슬 안채원 기자 = 직장인 채경순(36)씨는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스키 여제로 꼽히는 린지 본(34·미국)과 미케일라 시프린(23·미국)의 맞대결을 가장 기대하고 있다.
채씨는 "알파인 스키는 우리나라의 주력 종목이 아니지만 챙겨 보려고 노력한다"며 "시원하게 활강하는 게 주특기인 린지 본을 응원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올림픽에서 경기를 시청함에 있어 한국에 메달이 추가될지 여부는 나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큰 스포츠 이벤트가 열리면 메달 갯수에 열을 올리던 모습에서 벗어나 경기 자체를 즐기는 스포츠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메달밭인 쇼트트랙 경기 뿐 아니라 비인기 종목인 컬링이 예상 외의 인기를 끌고 있는가 하면 국적에 상관 없이 경기력이 좋은 선수를 응원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전 세계의 축제인 올림픽에서 지나친 '국뽕'은 경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국뽕이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의 합성어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도하게 도취돼 무조건적으로 국가를 찬양하는 국수주의적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다.
◇비인기종목·외국선수도 응원할래요
시청률 집계기관인 AGB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8일 저녁 열린 한국과 중국의 컬링 믹스 더블 경기(전국 기준) 시청률은 SBS(6.7%), KBS(5.7%), MBC(4.1%) 3사를 합쳐 16.5%를 기록했다. 한국에 메달을 안겨줄 종목이 아니더라도 스포츠 그 자체로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시청자들이 많아졌음을 방증한다.
나라를 떠나 순수한 스포츠 팬의 입장에서 외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여유도 보인다. 특히 김연아 이후 주목받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19·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다. 메드베데바가 피겨 팀이벤트 여자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자 네티즌들은 "메드메데바 특집방송 해줬으면 좋겠다"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한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황제' 스벤 크라머(32·네덜란드)의 한국 내 인기도 대단하다. 크라머는 우리 선수인 이승훈(30)을 제치고 5000m 경기에서 우승했지만 그의 사회관계서비스망(SNS) 게시글에 달린 수백개의 댓글에서 한국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축하해요 완전 멋있어요', '역시 빙속황제', '3연패 금메달 축하하고 평창에 계속 있어줘요' 등의 글들이 빼곡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크라머의 경기력을 치켜세우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30대인데도 정말 잘 탄다', '크라머가 수호랑(평창동계올림픽 공식 마스코트) 들고 찍은 사진이 빨리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축제 그 자체의 오락성을 즐기는 측면도 눈에 띈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9일 오후 포털 사이트에는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통가'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상의를 탈의하고 근육질의 몸매를 뽐낸 크로스컨트리 선수 피타 니콜라스 타오파토푸아가 화면에 잡히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통가오빠 내 맘 속에 저장', '통가오빠 출국 금지' 등의 제목을 단 타오파토푸아 선수의 '자투리 이미지 파일', 즉 '짤방'이 돌고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서는 "'김동가'씨로 한국에 남아 달라"는 우스갯 소리를 찾아볼 수도 있다. 몇몇 네티즌들은 타오파토푸아의 위키피디아에 자신이 그의 여자친구라고 수정하기도 했다.
◇2030 "과도한 애국심 스포츠 재미 망쳐"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윤택함을 누리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글로벌화를 체득한 젊은층에게는 메달 갯수를 집계해 '국가별 종합 메달 순위'를 매기는 것은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실망한다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오히려 축제에 과도한 국가주의 색채를 덧입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유모(31)씨는 "과도한 애국심은 기술적 표현과 예술성 등 스포츠 본연의 재미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예를 들어 피겨 스케이팅 경기는 선수들의 몸짓부터 감정 표현 등을 보는 것이 묘미인데 애국심이 관여되면 점수와 등수에만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 말했다.
안모(28)씨도 "외국인 선수를 귀화시키고는 '우리나라 선수가 메달을 땄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좀 우습다"며 "오로지 올림픽 때문에 우리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에게 국가를 부각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반응에 대해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2030세대는 외국의 컨텐츠를 즐겨 보고 해외여행 경험도 많아 개인주의적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이들에게는 국가 차원에서 누군가를 응원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짚었다.
과거 국가대항전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를 하는 것이 국가 혹은 체제의 자존심으로 연결됐다면 점점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색채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다. 오히려 응원에 있어 지나친 애국심을 요구하면 '국뽕'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구정우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소속된 정치공동체에 자부심을 갖고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며 "최근에는 우리 국민들이 한층 성숙해져 스포츠 경기에서 졌다고 국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구 교수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스포츠에서의 승패가 생존 활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니 스포츠를 '유희'로서 즐길 수 있게 됐다"며 "우리 선수가 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외국 선수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올림픽 순위에 집착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메달 집계를 별로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며 "스포츠나 문화를 정치의 하위수단으로 이해했던 것에서 벗어나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것은 정상화되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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