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사 혈성루에 오르면, 일만이천봉우리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기록을 증명하듯 이 그림 속에는 일만이천봉의 암산이 가득 채워져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겸로(謙老)’라 관서한 것으로 보아
겸재의 노년기 작품으로 생각되는 이 그림은 원숙한 필치로 과감하고
힘차게 내려 그은 전형적인 정선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암산과 토산의
경계에는 안개를 그려 넣어 지형을 구분하고 거리감을 살리고 있으며,
전경의 천일대 위에는 금강산의 장관을 유람하고 있는 갓 쓴 선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 취사선택과 생략의 화법을 쓴 진경산수화 ◆
진경산수화는 ‘우리 땅에 실재하는 우리의 산천’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분명히 실재 경치를 화폭에 담지만, 분명히 보이는데도 그리지
않거나, 혹은 반대로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음에도
그리는 것이 있다. [낙산사도]에 탑을 그리지 않은 화가는, 낙산사에 탑
이 있는 걸 모르거나 못 봐서가 아니라 낙산사와 주변 산세, 떠오르는
태양만으로 화면을 구성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탑을 ‘일부러’ 생략
했던 것이다. 진경산수화에는 이렇게 경물의 ‘취사선택’과 ‘생략’
의 화법이 들어있다. 보이는 그대로 다 그린다면 화면은 다종다
양하게 빼어난 절경으로 가득 차겠지만, 얼마나 복잡하고 어지
럽겠는가. 화가는 단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옮겨 그
리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풍경을 머릿속에서 다시 구성해
서 화폭 위에 쏟아내는 것이다. 낙산사는 화가의 재량과 상
상력을 통해 [낙산사도]로,정양사는 [정양사도]로 재탄
생하게 되는 것이다.
정선, 인왕제색도,(인왕산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 호암미술관 소장.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
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
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
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와 강희언(1738~84 이전)의 '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년(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
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
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선, 독서여가, 1740년, 비단에 채색, 24×16.8㎝, 간송미술관 소장.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은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창안자일 뿐 아니라 풍속화 분야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는 특별한 자료다. 41세 때인 1716년
제작된 초창기 작품으로, 공조판서 이광적 (1628~1717)의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아 북악산 및 인왕산 기슭에 살던 70세 이상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서 장수를 자축했던 것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묘년 풍악도첩>(1711년 작) 중〈단발령망금강산도〉.
금강산 여행 중 단발령 고개 에서 처음 금강산을 대면하는 순간을
그렸다. 이곳에 올라 금강산 풍모를 바라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는데서 단발령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