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은 부분에 얽매어 전체를 보지 못해 실수를 한다거나 결과만을 중요시해서 나머지 과정을 생략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일 것이다.
40대가 되면 불청객인 노안(老眼)이 찾아온다.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질 않는다. 가까이 있는 것을 잘 보려면 돋보기를 끼지 않으면 안 된다. 왜 노안이 찾아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노안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40대 부터는 가까이 있는 것을 너무 세밀하게 보지 말고 멀리 보라는 뜻일 게다. 보여도 못 본체 하라는 의미다. 젊어서는 나무를 보는 삶이었다면 노안이 온 후부터는 숲을 보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양병무(숙명여대 초빙교수, 한국인간개발연구원장) 2007/04/
어떤 나무는 너무 커 온몸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으나 아래엔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작은 나무들이 자랄 수 없게 하기도 하고, 다른 나무을 옥죄여야 살 수 있는 넝쿨나무들도 있다. 그러나 햇빛이 없는 축축한 그늘에는 버섯이나 홀씨식물들의 안식처가 되고 넝쿨들은 촘촘히 들어선 나무와 나무의 삶의 터전을 넓게 하는 작용도 한다.
이렇게 숲속의 한 그루의 나무나 한 포기의 풀들은 그저 제 본성에 충실하게 살면서 숲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포기마다 아름다움이 있고 한 포기 한 그루마다 겪는 삶의 여정엔 우주의 여정과 닮아 있어 그것 하나하나를 바라봄이 너무나 즐겁고 경이로운 것이다.
때때로는 우리가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무들이, 풀들이, 온갖 새들이, 곤충들이, 짐승들 그리고 수석들이 같이 섞여 모든 것을 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세히 보면 숲의 구성원으로서 개별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개별적인 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우를 범한다.
숲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다. 전체적이란 것은 나누어 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같이 있다.’라는 공존의 뜻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곧 하나임을 뜻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숲 속에서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다. 숲을 보려면 숲 밖에 나와야 하고, 큰 숲일수록 멀리서 봐야 숲의 윤곽이 제대로 드러난다. 작은 것에 현혹되어 작은 것을 보고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조적 사고에서 벗어난 것이다. 구조적 사고에서 벗어 날 때 창조적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삶은 수직적으로 살아야 한다. 수평적인 삶은 그 자체가 시간이라는 틀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다. 수직적 삶은 시간의 흐름도 없다. 곧 현재를 사는 것이다. 현재를 사는 것은 늘 새롭고 아름답고 창조적이다. 현재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늘 깨어있는 삶이며 매일 매일 새로운 탄생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의 삶은 너무 협소해서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것조차도 너무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창조성을 잃고 하루하루의 삶을 수평적으로만 산다.
수평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를 신봉한다. 그리고 과거의 경전들과 문화에 얽매어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살아 있으되 이미 화석이 되어 죽어있는 삶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또 복권처럼 한 방에 자신의 삶을 바꿔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전체적인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전체적이 아니니 늘 나누어 생각한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둘이니 갈등이 있다. 갈등을 하면서 나는 선이고 타인은 악이라 말한다. 내가 믿는 것은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이라 말한다.
어떤 이는 인간의 지혜를 창조주를 향한 믿음 아래 둔다. 창조주는 최선의 지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명쾌하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말하는 이 조차 창조주를 본 적 없이 그저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만을 바라보고 숲을 얘기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하나하나 나누어 보는 것도 아름다움이며 커다란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우리가 모여 이웃, 이웃이 모여 동네, 동네가 모여 도시가 되고 도시들이 모여 국가 되듯 하나가 온 우주 속에 하나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이것이 곧 창조주를 영접하는 것이며, 내가 곧 그와 함께 함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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