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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보호조약

감투봉 2012. 10. 5. 16:37

                       제 1차  <한일협약 ( 韓日協約) >

  <러일전쟁> 으로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자 ,< 대한제국> 과 <러시아>의 모든 <조약>이 <폐기> 되었다 .

   1904년 < 러시아> 와의 전쟁중 에도 <일본>은  그해 8월8일 < 윤치호>와 <하야시> 공사 사이에 제 1차 <한일협약>

   이 체결 됐는데 , 협약내용 에는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 으로 삼는다 .라는 내용대로 <외

   교 고문>은 < 친일파 미국인 > 스티븐스( Stevens) 가 추천 됐고 < 일본인 고문>이 수명 왔다 . 그러나 <외교고

   문> 스티븐스 는 월급은 <대한제국>에서 받고  일은 <  일본>을 위해 일을 했기 때문에 후에 <전명운 , 장인환 >

   사 에게 <미국>에서 죽임을 당한다 . ( 사진은 1908년 3월 23일 <미국> 쌘프란시스코 에서 <전명운 , 장인환>의사 의

    총에 사살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 의 기사 ) 이사건은 <미국전역>을 떠들썩 하게 했고 , 통역 을 맡은 <이승만>

   궤변 배반 으로 <미국전역>의 동포들을 두번 울렸다 . <이승만> " 나는 살인재판 통역 을 할수 없다 . " 였다 .

 

   1905년 3 월 7일 , 봉천회전( 奉天會戰) 과 < 발틱함대 >의 전멸로 < 러시아>는 전의를 상실 , 소강상태에

   이르자  <일본 과 미국>  <가쓰라 태프트  조약 ( The Katsura Taft Agreement)> 을 맺고 (1905 . 7 )

  < 1905년 9월 5일 > < 러 일> 간 <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러시아>는 완전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하고 <일

  본> 은 본격적  으로 < 대한제국> 의 < 침탈>을  감행 한다 .

 

    1905 년 11월 9일 , < 일본의 특명 전권대사 > 이등박문 <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은 < 서울> 에 도착한

    다음날 , < 11월 10일 > < 고종황제>께 일왕의 친서를 바치는데 , 내용은  " 짐이 (내가)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여

   대사를 특파 하노니  " 대사의 지휘를 일종 ( 하나같이 복종) 하여 조치 하소서 " . 였다 .

 

    < 1905년 11월 15일 , > 일본공사 < 하야시 곤스케 >와 <대한제국 > 주재(駐在)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長谷川> 이 증원군 을 <일본>에서 파송받아 < 궁궐 : 경운궁 > 밖과 안을 겹겹이 애워싸 <대한제국> 의 <황궁>

    공포속에 몰아넣고 불안감을 조성하며 < 이등><고종황제> 를 강요와 압박을 하였으나 , 끝내 <조약승인>을 거부

    하였다 . < 고종황제>로선  최선의 방어 였다 .

 

     그러나 , <일본>은  이미 <고종황제> 의 거부를 예상하고 <4일전> 11월 11일 , < 외무대신 박제순>을 <일본공

     사관> 으로 불러 <조약체결>을 강박하고 ,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 大臣> 과 원로대신( 元老大臣)심상훈

    ( 沈相薰) 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 풀이 하므로 써 ,  예상치 않은  의외로

      많은  지지를  얻게 되는 성과  에 고무되어 <고종황제>를 강박 하였으나 < 거부>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  

 

                                         

 

                  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 을사늑약(勒約)

 

< 11월 17일 > 마침내 <일본>은 경운궁 에서 <어전회의 ( 御殿會議)> 를 열도록 했으나 ,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 < 이토 히로부미><하세가와 >군 사령관 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수십명의 <일본헌병>들의 호위를 받고 직접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 으로 위협과 공갈로 <황제>와 <대신>들을 모욕하며 <메모용지><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

<부>를 따져 물었다 . 이때 조용하던 <궐내>가 술렁이며 큰소리로 <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

 

그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들의 무례한 행위와 공갈 협박에 , 분노를 참던 참정대신 < 한규설 ( 韓圭卨)>의 통분의 통곡소리

였다 . < 이토><헌병대장>은  항변하며 통곡하는 <한규설>을 제압시켜 <별실>에 가두고  " 반항하면 죽여 버려! 라고

외쳤다 ,  <회의결과>  참정대신 <한규설 > 탁지부대신 <민영기 > 법무대신 <이하영> 이 무조건 < 불가 (不可)>

썼고 ,  (친러파)였던 학부대신 < 이완용> , 군부대신 <이근택> , 내무대신 <이지용> , 외무대신 <박제순> ,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은 모든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며 <찬의>를 표시 하였다 . 이 <찬성>한 5명을 < 을사5적> 이라한다 .

< 이토 히로부미>각료 8대신 가운데 5명<찬성>했으니 <조약안건>은 가결 됐다고 선언 하고 궁내부대신 <이재극>

을 통해 그날밤 <고종황제>칙재(勅裁)를 강요 하였다 . 같은날짜로 외무대신 <박제순> <하야시 곤스케>간의  이른

바  이협약의 정식명칭 인 < 한일협상조약>이 체결 되었다 . 이 <조약>은  제 2차 < 한일협상조약> 인 셈이다 .

( 사진은 끝까지 반대한 " 참정대신 "< 한규설 : 1856 - 1930>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주는 <작위>도 거부 하였다 . )

                                  ( 11월 15 일자 에 유포된 <을사5적>을 성토하는 < 성토 격문 >

            

< 을사 5 적 >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군부대신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농상대신 권중현 (權重顯)

 ( 을사보호조약) 이 체결된 < 경운궁 >  중명전 , ( 현 덕수궁 내 건물 )

 是日也 放聲大哭 (시일야 방성대곡 )      張 志 淵 (장지연) 황성신문  2.101호 (1905. 11. 20)

            "  오늘이여  목놓아  크게  우노라 ! 당시 신문원본 을  쉽게 풀이한것을 옮겨 보았음 .

 

 지난번 이등( 伊藤: 이토) 후작이 내한 했을때 어리석게 우리국민들은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 의 정족 안녕을 주선

하겠노라 , 고 자처했던 사람이라  , 오늘 내한함이 필경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라 ,  하여

인천항 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 (官民上下)환영하길 마지 않았다 . (이하 생략 ) 그러나 , 대황제 폐하 의 성의 (聖意)가

강경하여 <조약> 이 성립되지 않은것을 <이등후작> 자신도 잘 알것인데 , 슬프도다 !  저 개 돼지 보다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작자들이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하여 ,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

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원했노라 ,( 이하생략) 참정대신 이란자는 우리정부의 수석( 首席) 임에도 부(否)자

서 책임을 면 하려 했더란 말인가 ?  김청음 (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 정동계( 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폐하 를 뵈올것 이며 , 그 무슨 2천만 동포와 얼굴

을 맞댈 것인가 ? 아 ! 원통하고 분한지고 , 우리 2천만 동포여 , 노예된 동포여 , 살았는가 ? 죽었는가 ?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것인가 ? 원통하고 원통하다 ! 동포여! 동포여!

 

              ( < 시일야 방성대곡> 을 요약하여 쉽게 옮겨 봤다 . 이글을 쓴 <장지연>은 너무슬퍼 술에취해 끝을 맺지 못하고 <기절>

하여 동료가 마지막을 이어썼다는 설(說)이 있다 . 이때 신문은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하여 <장지연>은

구속되고 <황성신보>는 3개월 <정간>을 당했다 . 그러나 그 <파급효과>는 엄청난 <의병>항쟁과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

 

                  충정공 (忠正公) 민 영 환 ( 閔 泳 煥 ) 1861- 1905

 (명함 에 연필로 다급하게 쓴 민영환>유서 .국민 각국공사관 에 보내는

 2통 유서를 남겼다 . < 민영환><을사보호조약> 에 항거 ,

 1905년 11월 18일 , 조병세 (趙秉世) 와 백관을 거느리고 대한문 에 나가 강력히

 반대 하였으나 일본헌병 들의 강제해산 으로 실패 ,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

 소청을 열고 상소 를 의논 하던중 , 대세가 기울어 짐을 보고 <전동> 이완식

 (李完植) 의 집에가서 <유서2통>을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소지하고 있던 칼로 <자결>했다 . 의정부대신 에 추증 되고 고종 묘정

  배향 , <1962 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重章) 이 추서 되었다 .

  밑에 유서내용 을 일부 공개 하겠다 .

 

               

     ( 유서 내용 ) :  대한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 .

 슬프다 .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  무릇 삶을 요하는자는 반드시 죽고 , 죽음을

 기하는자 는  반드시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여러분은 어찌 모르겠는가 ?

 ( 이하 일부생략)  부디 우리동포 형제들  은 천만으로 분려를 배가하여 자기를

 굳게하고 학문에 힘쓰고 결심육력 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 하면 ,

 죽은자 가 마땅히  땅속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

 슬프다 .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    < 민영환 >

             

 이때에 민영환 , 조병세 ,이한응 , 홍만식 (홍영식 의 형), 송병선 , 이상철 ,

 전봉학 ,등도 자결로 항거 하였다 .<을사5적> 이근택 , 권중현 , 의병

 들의  습격을 받았고 , 이완용 , 박제순 ,의 집엔 불을 질렀다 .

 통감부 설치 이후 국내각지 에서는 의병 이 일어났는데 , 민종식 (충청도 ) ,

 최익현 , 임병찬 (전라도 ) ,신돌석 (경상도 )

 유인석 (강원도 ) 등이 일본인 배척 운동을 전국적  으로  전개 하였다 .

 

 < 1906 년 1월 29일>에 작성된  <을사체약 무효 선언서 >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위원 에게 건내 졌고 또 같은날 ( 1906 , 6 , 22 )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 <무효>를 호소 했으나 실효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

 

 

 <고종황제> 는 억울함을 포기치 않고 , 국내외 의 압력에도 < 1907년 4월 20일 > 

 이준 (李儁) , 이상설 (李相卨) 이위종 ( 李瑋鍾) 에게 < 1907 년 6월 15 일 >

 네덜란드 <헤이그> 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보내 을사보호

 조약 무효선언서 를 공개하고 <대한제국>의 억울함 을 온천하에 호소 하려

  했으나 참석불가 로 실패한다 .

               ( 윗 사진은  네덜란드  < 헤이그 > 의 " 만국평화회의 " 회의장 전경 . <1907 년 6월 15 일>)

  이준 ( 1858 - 1907) 열사는 불참을 통분히 여겨 분사( 憤死) 했다 .

  1896년 <독립협회 > 초대 <평의장 >을 거쳐 <헌정연구회> 를 조직 하였고 ,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연합회의소장> 이 되어 모금운동 을 벌렸으나

  < 친일단체> 일진회 의 방해공작 으로 좌절한 직후 <고종황제>특사

  <헤이그 >에 파견 되어 분사한 것이다 (  1907년 7월 14일 )

 

  내가 중학교 땐 이준열사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어 만국회의장 ,

  각국 대표단 의 얼굴에다 피를 뿌리고 죽었다.고 배웠다 .

 

  그러나 요즘 , 새로운 설(說) 이 등장 , 단지 얼굴에 난 악성종기 를 건드려

  급사 했다 , 는 설(說)인데 , 누가 지어낸 것인지..? 아마도 당시 친일지

  < 경성신문 > 에 " 오랜 기차여행 여독 종양패혈증 을 일으키는

  단독 이 재발되어 사망 했다고  기사화 됐는데 ,  이는 통감부 의 주도로

   기사화 됐을 것이다 . <일본>으로선 < 악재 >이 므로 은폐외곡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 증거순국열사< 궐석재판>까지 열어 < 종신형>

   처한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자연사>가 고개를 든다 .

 

  ( 이준열사 옆의 전문은 1907년 4월 20 일 < 고종황제 > 의 옥새가

  찍힌 특사 <위임장 >이다 .)

       

  ( 네덜란드 < 헤이그 >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순국당시 묘에서

   유골을 환국 (還國) 한후 다시 세운 기념비 .

  ( 옆사진 은  왼쪽부터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제씨 )

  

  <헤이그> 밀사사건 은 단순히 이준열사 분사 , 할복 , 자연사 , 병사 ,

  떠나 국내사정 을 더욱 악화 시켰다 . <일본>통감부 압박은  이완용 , 송병준

  에게 고종황제 퇴위강요 하도록 종용 한다 , <친러파>였던 이완용

  <친일파>로 변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토록 하고 <퇴위>까지 강제하는

  불충을 저질렀으니 <친일파>송병준은  고종황제 께 큰소리로 " 친히 일본

  도쿄로  가셔서 " 일본 <천황폐하>께 사죄를 하던가 , 자결을 하시오 ".

  라고 외치며 고종 의 따귀를 쳤다 , 하는데 . 진위 는 가릴수 없으나 ,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

  

 (  퇴위 를  당하는 < 고종황제 > 이젠 힘없는 궁궐에 노인으로 전락 한다 . )

 

 

 왕조 500 년 을 더듬어 봐도  <왕>에게  손사례 나 삿대질 , 큰소리는 절대

 불가하며 이는 불충과  국치 (國恥) 와 민욕(民辱) 으로 다스려 3족하는

 형벌이 마땅할 것이나 , 힘없는 <황제>는 이 굴욕을 감내 해야만 했고 ,

 폐위 를 당해야만 했다 .

 

             

  (  고종황제 께 퇴위 하라고 큰소리치며 압박을 가했던 < 친일파  송병준 >

  사람은 외형으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 송병준 민영환

  식객으로 , 별볼일 없을때 민영환 의 주선으로 출세 를 한 사람인데 , 공교롭게

  후손들이 민영환 의 땅을 송병준 땅이라고 소송을 제기해 계루중 에 있다 한다 .

   개도  사흘 먹이면  주인을 안다 했다 . 이자는 개만도 못한 인간 이다 .

   주인을 물려 드는 미친 분견 (糞犬) 인 것이다 .   에 인물은 카멜레온 같은

   이완용 이다 .

 

  오늘날 이땅에 진정한 보수세력 이 존재 할까 ? 암만 눈 씻고 상하 좌우 를

   살펴봐도 , 실망스런 군상들만 친일보수란  지저분  한  덧칠만 입힌

   삐에르  같은 붉은입술 에 흰칠로 분장한 세력들 뿐이다 , 당연히  진정한

   보수존재 치 않는다 . 다만 , 친일에 덧칠한 기형적 보수만 존재할

    뿐이다 .라고 결론을 내는게 정답일 것이다 .

 

   굳이 보수를 원한다면 , 묵묵히 그때그때 , 참된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며 국가와 

   민족발전에 저해 되는 이적행위증오하면서 비판을 아끼지 않으며 도덕적

   가치관 을 사랑하는  , 국난에 목숨을 아낌없이 던져 ,  애국관까지 겸비한

   이웃이 진정한  보수 일 것이다 . 이웃의 불행에 마음아파 하며 사회에

    땀을 흘리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눈물과 목숨을 버리는 이가 진정한

                                 보수세력 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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