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키워드로 돌아보는 박근혜 정부 4년

감투봉 2017. 3. 15. 08:52

키워드로 돌아보는 박근혜 정부 4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탄핵안을 가결시킨 지 91일 만이다.
이로써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 탄핵으로 불명예 퇴진한 대통령이 됐다.

  • 구성=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7.03.14 08:12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전자 결재하는 것으로 첫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이 날은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1월 21일 트렁크 6개를 들고 떠난 지 만 33년 3개월하고도 4일(1만2151일)째였다. ▶기사 더보기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차에 올랐던 박 전 대통령(왼쪽 사진)이 2013년 2월 25일 취임식을 마친 뒤 다시 들어오는 사진(오른쪽 사진) /청와대 제공·조선DB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을 결정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뜻하지 않게 두번 떠나는 몸이 됐다. 헌재의 판결은 선고 즉시 효력이 발생해 대통령의 직위는 자동적으로 파면됐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내려온 박 전 대통령. 지난 4년 간의 주요 국정 사안을 키워드 별로 정리했다.


#창조경제

지역 별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 창조경제 페스티벌 등 창조경제 관련 행사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 /조선DB, 연합뉴스

박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당시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단어이다. 지난 4년간 대한민국의 경제 및 문화 정책은 '창조경제' 아래에서 기획되고 운영돼 왔다. IT(정보통신)·문화·콘텐츠·서비스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신(新)산업을 창조한다는 것이 창조경제의 핵심 전략이었다.  ▶기사 더보기

창조경제는 초기 "내용과 실체가 없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꾸준히 단계를 밟아가면서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2015년에는 전국 17개 시도에 18곳의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설치됐고 이곳에서 1500여개의 스타트업 기업이 지원을 받으며 창업의 꿈을 키워왔다. 그 결과 성과를 보이는 기업들도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 정책의 방향성과 필요성은 인정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박근혜 정부의 벤처 창업 지원은 그래도 잘한 일"이라며 "정권이 바뀌더라도 더 발전시켜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상징처럼 인식돼온 ‘창조경제’도 사장·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통일대박

(위부터) 2014년 3월 독일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門)을 시찰하며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브란덴부르크문(門)은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나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는 통일의 상징이 됐다.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 대박"을 얘기하는 박 전 대통령. 통일준비위원회에 참석하는 박 전 대통령. /연합뉴스, 조선DB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1월 6일 신년 첫 기자회견에서 "국민 중에는 통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다"며 "그러나 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반도 통일은 우리 경제가 대도약할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통령 스스로 통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기사 더보기

출범 초기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였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남북한이 서로의 요구사항을 국제적 규범에 근거하여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신뢰 외교'를 가리킨다. 갈등을 넘어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남북한 관계 변화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얘기한 '통일 대박' 역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연장이었다.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해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대통령 스스로 통일 의지를 밝히고, 통일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통일 대박론'을 실현시키기 위해 같은 해 통일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통일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 민간, NGO 등 여러 단체 가리지 않고 도움을 받겠다고 밝혔다. ▶기사 더보기

하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통일대박론은 집권 내내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여러 사안들이 겹치면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2016년 초, 개성공단이 폐쇄되면서 더 이상 통일 담론을 얘기하기 힘들 정도로 남북관계가 경색됐다.

박 전 대통령이 얘기한 '통일 대박'이라는 표현이 국정농단의 장본인인 최순실의 아이디어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통일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인 줄 알았던 국민들은 또 한번 최순실의 국정 개입 의혹에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의혹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통일 대박' 용어는 신창민 중앙대 명예교수의 책 '통일은 대박이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여러 회의를 거치며 박 전 대통령이 활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 더보기


#해외순방

(위에서 왼쪽부터) 프랑스 순방 때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박 전 대통령, 이란 순방 당시 히잡을 쓴 박 전 대통령, 인도 총리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날 때도 한복을 입었다. /조선DB,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총 26번의 해외순방을 다녀왔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국가의 대외 이미지 제고를 비롯한 정치·외교적 효과뿐만 아니라 경제적 성과도 거둘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방문한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영국이 국빈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 훈장인 '바스 대십자 훈장 (Grand Cross of the Order of Bath)'을 받고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함께 '1호 마차'에 올라 양국의 우정을 거듭 확인했다. ▶기사 더보기

 박 전 대통령의 2014년 UAE 방문은 한국전력공사가 60년간 54조 규모의 UAE원전 운영사업에 대한 투자계약을 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UAE 순방에서 원전 1호기 설치식에 직접 참여하는 등 양국 간 관계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기사 더보기

하지만 순방이 너무 잦다는 부정적인 시선도 존재했다. 국내에서도 처리해야 할 국정 현안이 많은데 '세일즈 외교'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비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순방 횟수는 故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는 많았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는 적었다. 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23회, 故노무현 전 대통령은 27회를 다녀왔다. 가장 많은 해외 순방을 다녀온 사람은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49회이다.


#재난대응

(왼쪽부터)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며 눈물 흘리는 박 전 대통령, 세월호 사고 당시 중대본에 도착하여 대책을 논의하는 박 전 대통령, 메르스 관련 상황을 지켜보는 박 전 대통령 /연합뉴스

4년 재임 기간 중 큰 재난 사건이 여러 건 발생했다. 2014년 취임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와 2015년 메르스 감염병 등 국가적 재난은 박 전 대통령의 위기 대응 능력을 시험했고, 이 때마다 지지율은 심하게 요동쳤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것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쯤. 청와대에 첫 보고된 시각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첫 보고를 받은 이후 여러 차례 “배의 창문을 깨서라도 전원 구조하라”며 철저한 구조를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넘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한 것 때문에 야당과 희생자 유족들로부터 “대통령이 재난 상황에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월호 문제는 국회가 박 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는 사유에도 포함됐다.  ▶기사 더보기

2015년 5월 발생한 메르스 감염병 대처에도 허점을 보였다. 청와대는 메르스 첫 확진자가 발생한지 15일 만에 '메르스 관련 긴급 대책반'을 편성해 24시간 비상 근무체제에 들어갔다. 이미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3차 감염자가 발생, 확진자가 18명으로 늘어난 때였다.  ▶기사 더보기

박 전 대통령은 방미 일정까지 연기하면서 메르스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으나 초동 대응에 실패하면서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메르스 사태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29%로 취임 후 첫 20%대를 기록하며 하락했다. ▶기사 더보기


#국정농단

(왼쪽부터 차례로)1차, 2차, 3차 대국민 담화 때 박 대통령의 모습, (오른쪽 세로 사진) 3차 대국민 담화를 마치고 퇴장하려는 박 대통령 /연합뉴스, 조선DB

지난해 7월 언론에서 제기되기 시작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 사건은 10월로 접어들면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박 전 대통령은 권한을 남용해 주요 그룹에 재단 기금 출연과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에 대한 지원을 강요한 혐의를 받았다. 관련 의혹을 밝히기 위한 국회 국정감사 청문회에 재벌 총수 9명이 한꺼번에 불려가는 일이 벌어졌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뇌물 혐의로 구속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서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됐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도 지난 5개월간 매주말마다 진행됐다. 국회는 촛불집회과 이어지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날짜가 다가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태극기 집회’도 갈수록 큰 규모로 열렸다. ‘탄핵 찬반’으로 갈린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동시에 열리며 심한 갈등 양상을 보였다.


헌법재판소는 91일간의 심리 끝에 3월 10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안을 인용해 파면시켰다. 헌재는 “피청구인(박 대통령)이 최서원 사익 추구를 위해 지원했고 헌법·법률 위배 행위는 재임 기간 중 지속적으로 이뤄졌다"며 "이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행위”라고 인용 사유를 밝혔다. ▶기사 더보기

헌재의 탄핵 인용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이틀 간 청와대에 머물며 신변정리를 한 후 12일 삼성동 사저로 옮겼다.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4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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