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39년 삼성맨'...세계 반도체 전쟁 기름부을 뻔 했다

감투봉 2020. 6. 17. 16:58

'39년 삼성맨'...세계 반도체 전쟁 기름부을 뻔 했다

    입력 2020.06.17 10:56 | 수정 2020.06.17 13:57

    취임 4개월만에 사퇴한 장원기 전 사장
    5대 그룹 CEO 출신으로 첫 中 부회장
    미국, 소송 벌이며 첨단 인력 유출 막아
    격화되는 '미-중 테크 전쟁' 주목해야

    “파장이 더 커지기 전에 중국 기업 부회장 자리에서 4개월 만에 물러난 것은 잘 한 결정입니다. 격화되는 세계 반도체 전쟁에서 자칫 희생양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재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장원기(66) 전 삼성그룹 사장의 중국 기업 부회장직 사퇴에 대해 지난 16일 이렇게 말했다.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 부문에서 주로 일한 장 전 사장은 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중국 사장(2012~17년)을 지냈고 2년간 고문(顧問)으로 있다가 지난해 삼성을 퇴임한 ‘39년 삼성맨’이다.
    그는 올해 2월말 중국 에스윈(ESWIN·北京奕斯偉)과기그룹 부회장에 취임했다. 에스윈그룹은, 중국이 한국을 맹추격 중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용 구동칩셋을 비롯한 시스템반도체 설계·생산 전문 기업이다.

    2018년 4월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우한의 반도체 기업 XMC를 방문해 현장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시 총서기가 집권한 후 반도체 기업을 찾아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신화 연합뉴스


    비록 4개월 단명에 그친 그의 중국 기업 근무는 여러 각도에서 국내외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장원기 전 삼성중국 사장/조선일보 DB


    중국 기업 부회장 된 첫 삼성전자 CEO

    무엇보다 그는 한국 1위로 세계적 기업인 삼성의 CEO급 인사 가운데 중국 경쟁사로 옮겨 고위직이 된 첫번째 사례이다. 5대 그룹을 통틀어도 퇴임 후 중국 기업 부회장으로 이적(移籍)한 CEO 출신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부회장은 2017년 4월 중국 통신·스마트폰 기업인 화웨이의 ‘총괄고문(Chief Advisor of Huawei)’을 맡았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은퇴 후 1992년 중국 수도강철의 ‘명예고문’에 위촉됐다.
    그런 점에서 한참 오래 전 현장을 떠났으며 최신 기술자도 아니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장 전 사장의 중국행 자체가 ‘부정적 선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기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그의 중국 기업 근무는 중국의 달콤한 영입 제의에 고심하던 국내 인재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무너뜨려 이후 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급의 중국행이 속출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이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는 시스템 반도체와 OLED 업종에서 한국 추월의 최선두에 있는 회사가 그를 영입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중국은 ‘공산당에 의한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 국가가 된다는 ‘테크 굴기(崛起·우뚝 섬)’를 국가 목표로 정해놓고 있다. LCD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은 중국은 반도체와 최신 OLED디스플레이에서 ‘한국 추월’ 공세를 노골화하고 있다.

    장원기 전 사장과 10여년 전부터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로서 그를 직접 영입했다는 왕둥성 에스윈그룹 회장은 삼성과 LG를 격파하고, 1993년 자신이 세운 BOE를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기업으로 키운 주인공이다. ‘중국 LCD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에스윈그룹 홈페이지에 올린 회장 메시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왕둥성 중국 에스윈(ESWIN)과기그룹 회장은 자사 홈페이지에서 올린 글에서 "중국 대륙의 반도체 결핍과 디스플레이 부족을 해결하는 게 자신이 꿈"이라고 했다./에스윈과기그룹 홈페이지 캡처


    “전자·정보산업계의 노병(老兵)으로 나는 늘 중국 대륙의 반도체 결핍과 디스플레이 부족 문제 해결을 꿈 꿔왔다. 게다가 친구들은 ‘당신은 이미 디스플레이 문제는 해결했다. 응당 반도체 분야에서 공헌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2019년 7월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중국이 2025년까지 달성을 내건 ‘반도체 자급률 70%’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1위’가 왕 회장에게 미룰 수 없는 필생의 과제임을 보여준다.

    미·중은 國運 건 반도체 전쟁…소송 벌여 中으로 인력 유출 차단

    2020년 지금 세계적 차원에서 전례없는 ‘테크(Tech·기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부담이다. 중국이 공산당 일당 독재와 디지털 전체주의를 고수하며 경제 성장을 넘어 글로벌 패권 확대에 나서자, 미국 조야(朝野)는 2년여 전부터 대중(對中) 압박·봉쇄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런 흐름은 ‘코로나 19’ 사태 등을 계기로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이 최근 반중(反中) 경제동맹 구상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을 만들어 한국의 동참을 압박하고 중국을 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서두르는 것은 그 결정판이다.

    이 과정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은 각각 수십조~수백조원을 쏟아부으며 국운(國運)을 건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은 이미 2018년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핵심 인재 2명을 스카우트하려던 중국의 시도를 법적 소송을 벌여 막았다.
    김봉만 전경련 국제협력실장은 “시장 경제를 중시하는 미국조차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올들어 연방정부 및 의회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그 밑바탕에는 반도체 기술 전쟁이 군사 전쟁 못지 않는 미·중 대결의 최대 승부처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와 검찰 등은 지난해부터 미국 학계·기업·싱크탱크 등을 상대로 한 인재 및 기술 획득 프로그램인 중국의 ‘천인(千人) 계획’(Thousand Talents Plan·1000명의 첨단 인재 확보)에 칼을 빼들고 무력화(無力化)에 나섰다.
    IT 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글로벌 인재 스카우트 통로가 차단된 중국이 주변국인 한국 인재 사냥을 재개한 신호탄이 바로 장원기 전 사장 영입 사례”라며 “그의 중국 반도체 기업 부회장 근무는 한미(韓美) 양국 간에 불편한 기류를 형성하고 이미 달아오르고 있는 세계 반도체 전쟁에 기름을 부을 뻔 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장 전 사장 개인에 대해 미국 정부가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미국 조지타운대 '안보 및 신흥기술 센터'의 윌리엄 한나스(William Hannas) 애널리스트가 주도해 올 9월 출간되는 '중국의 외국 기술을 향한 갈구-간첩 행위를 넘어서(China's Quest for Foreign Technology-Beyond Espionage' 책 표지. 윌리엄 한나스 애널리스트는 '천인 계획(the Thousand Talents program)' 등을 이용한 중국 정부와 공산당, 기업의 해외 기술 획득 공세를 분석했다./아마존 닷컴 캡처



    “기업인 대우 높이고 기술 인력 유지·관리 전략 세워야”

    이번 중국행 논란을 계기로 사회적 인프라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박승준 최종현학술원 고문은 “선진국에서 중·후진국으로 산업 이전(移轉)은 어느정도 불가피하다”며 “중국에 대한 불안감이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게 아니라 중국과의 격차 확대를 위해 연구개발 등 우리의 실력 키우기에 매진하는 게 정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위직·핵심 인력의 중국으로의 이탈을 방치해 기술 인력 유출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한·중간 ‘기술 초격차’ 유지는커녕 역전(逆轉)이 불을 보듯 뻔한 게 현실이다. 중국의 첨단 기술 획득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하고 은밀한 탓이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CEO를 포함한 경영자와 고급 기술 인력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높이고, 그들이 역량과 경험, 노하우를 은퇴 후에도 국내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인력 유지·관리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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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7/20200617016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