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11조' 삼성家..영국 기업이었다면 3조6000억
정인설/정영효 입력 2020.10.28. 17:29
가혹한 한국 상속세
(3) 백년기업 막는 징벌적 세금
사진=연합뉴스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한국 정부에 내야 하는 상속세가 11조원 안팎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삼성이 영국에 있다면 3분의 1 수준인 3조6000억원가량만 영국 정부에 납부하면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선 기업상속공제가 적용돼 각각 3000억원, 6000억원대 상속세만 내는 것으로 파악됐다.
28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삼성그룹 본사가 영국에 있다면 이 회장 상속 주식(약 18조2200억원)에 대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이 내야 하는 세금은 3조6439억원으로 추산됐다. 상속재산에서 비과세 기준액(약 4억8000만원)을 뺀 뒤 상속공제를 고려한 상속세율(20%)을 곱해 산출한 수치다.
영국의 명목 상속세율은 40%지만 직계비속이 기업을 승계하면 기업 규모에 따라 50~100% 상속공제를 해줘 상속세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이에 비해 한국에선 상속세 최고 세율(50%)에 대주주 할증(20%)이 붙어 60%의 세율로 11조원에 육박하는 세금을 내야 할 상황이다.
독일에 삼성 본사가 있다면 상속세는 한국의 절반 수준인 5조4659억원으로 떨어진다. 독일도 직계비속에게 상속할 때 명목세율을 50%에서 30%로 낮춰준다.
임동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들이 상속 후에도 투자와 고용을 계속 늘릴 수 있도록 기업 승계 시 상속세 부담을 줄이고 상속공제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렌베리·포드·하이네켄…'백년기업' 뒤엔 국가의 승계 지원 시스템
한국선 경영권 방어장치 없이 富 대물림 차단에만 초점
미국과 유럽에는 100년 이상 된 기업이 많다. 스웨덴 발렌베리와 미국 포드, 독일 BMW, 네덜란드 하이네켄까지 모두 창업주 가문이 3대 이상 경영권을 대물림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승계 때마다 다양한 제도를 활용해 상속세 부담을 줄이고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엔 기업 승계를 지원하는 제도가 부족하다. 대기업의 승계에 대해선 더욱 더 그렇다. 한국에서도 100년 기업이 많이 나오려면 각종 규제로 경영권 승계를 막기만 할 게 아니라 합리적 상속세 체계를 갖추고 여러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100년 기업 공통점은 상속 지원
발렌베리그룹은 올해로 164년 된 기업이다. 발렌베리재단이 지주사를 세우고 에릭슨(통신), 일렉트로룩스(가전), 스카니아(건설장비), 아스트라제네카(제약) 등 약 100개 기업을 지배하는 구조다.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20~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이 그룹은 창업주인 발렌베리 가문이 5대째 경영하고 있다. 공익법인 제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웨덴은 공익재단에 상속·증여세를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발렌베리 가문은 별다른 세금 부담 없이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발렌베리 가문은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공익법인(발렌베리재단)을 뒀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 자리를 후대에 물려줬다.
재단은 철저하게 공익을 위해 운영했다. 계열사에서 받는 배당금의 80% 이상을 과학 연구와 교육 등 공익사업에 투자했다. 독일 보쉬, 덴마크 레고 등도 발렌베리처럼 공익법인을 통해 경영권을 물려주고 있다.
포드는 재단과 차등의결권(복수의결권) 주식을 함께 이용했다. 차등의결권은 경영진이나 최대주주에게 보유 주식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경영권 방어장치다. 포드는 상속세 면제 범위 내의 일반 주식은 포드재단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주당 16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 주식을 후대에 물려주며 경영권을 유지했다.
BMW는 책임이 한정된 유한합자회사 형태의 지분관리회사로 장수기업이 됐다. 다양한 회사 형태를 인정하는 독일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이네켄은 다층적 지주회사를 허용하는 네덜란드 정부 방침을 활용해 세금을 아꼈다. 하이네켄 오너들은 의결권 과반을 실질적으로 보유하는 최대주주임에도 불구하고 산술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접적 지분율(20%)을 통해 상속세 부담을 완화하면서도 지배력을 유지해 기업을 승계했다. 일본 도요타는 순환출자를 활용해 최소한의 지분으로 최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업 승계 어렵게 규제만 하는 한국
한국 기업들은 경영권을 물려주기 쉽지 않다. 우선 기업 승계 때 상속세율이 높다. 일반 기업 승계 시 상속세 최고 세율은 6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명목 상속세 최고 세율(50%)에 대주주 할증(20%)이 붙은 결과다. 일본(55%) 프랑스(60%) 벨기에(80%)의 상속세 최고 세율은 한국보다 높지만 각종 공제가 많아 기업 승계 상속세율 면에선 한국보다 낮다. 한국에선 중소기업 승계만 가업상속공제제도를 통해 지원해줄 뿐 대기업 승계는 상속세를 감면해주지 않는다.
한국에선 미국과 유럽 사례처럼 재단을 활용한 경영권 승계가 힘들다. 각종 혜택이 적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기업 주식을 공익재단에 출연하면 지분율 20%까지 상속·증여세를 면제해준다. 한국에선 면제 범위가 5% 미만이다. 5% 이상일 때는 기업 승계 상속세 최고 세율로 60%의 세금을 낸다. 공익재단의 의결권 제한 비율도 30%에서 15%로 강화된다.
그렇다고 경영권 방어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 일본 등에 있는 차등의결권은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비상장 벤처기업에만 차등의결권을 인정해주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합리적 수준의 상속세를 부담한다면 정부도 기업 지배력을 유지할 최소한의 장치는 마련해줘야 100년 기업과 장수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인설 기자/도쿄=정영효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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