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같은 뿌리” “민족·종교·언어 달라”… 러·우크라 악연의 역사

감투봉 2022. 3. 1. 11:33

“같은 뿌리” “민족·종교·언어 달라”… 러·우크라 악연의 역사

 

800년전 갈라져나왔지만… 우크라 ‘300년 러 영향권’ 아픈 역사

입력 2022.03.01 03:00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했다. 1100년 전 ‘키예프루스’라는 뿌리가 같아서 자국의 일부였다는 것일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소비에트 연방적 사관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키예프루스에서 나왔지만 러시아와는 구성 민족도 달랐고, 우크라이나는 독자적 종교도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우크라이나어과)는 “푸틴의 주장은 한국이 중국 일부라고 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며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법치와 민주주의를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영웅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군을 물리치고 1649년 키예프로 입성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흐멜니츠키는 17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외교적 오판으로 러시아가‘우크라이나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위키피디아

◇하나의 뿌리 ‘키예프루스’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는 9세기경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 출현한 첫 국가 ‘키예프루스’를 모체로 삼는다. 지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우크라이나어로는 키이우)가 수도라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종가(宗家)라고 여긴다. 쉐겔 교수는 “범슬라브민족 국가였지만 지금 우크라이나를 구성한 부족과 러시아를 구성한 부족이 달랐고, 당시부터 키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달랐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다른 것처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도 다르다”고 했다. 한·중·일이 한자 문화권이지만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와는 차별된다는 것이다.

키예프루스가 국교로 삼았던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지만, 고유 종교도 있다. 정교와 가톨릭을 접목한 ‘통합교회’(우니아트)다. 소련 지배 시절 탄압받던 통합교회인들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400만명가량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민족·언어·종교에서 독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흐멜니츠키 봉기와 페레야슬라프 협정

키예프루스가 몽골 침략으로 멸망한 뒤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 군사 자치체인 ‘코사크’가 등장하면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나타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영웅으로 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1596~1657)는 그 주역이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코사크 부대는 폴란드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코사크 지도자였던 흐멜니츠키는 한때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턱밑까지 진군하며 승리한다.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그는 개선장군이 돼 1649년 키예프로 귀환한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수립한 것이다. 구자정 대전대 교수는 이 시기를 “러시아와 민족적 차별성을 주장하게 되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첫 출발”이라고 논문에서 평했다.그러나 이는 짧았다. 약속과 달리 폴란드는 역공에 나섰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 공국(지금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이 맺은 ‘페레야슬라프 협정’(1654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원본이 분실됐기 때문이다. 소련과 러시아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러시아어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가 복속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단기적 군사 동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며, 원문도 남아있지 않은 협정 내용을 러시아가 ‘당시 통일됐다’며 날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글항아리)를 쓴 구로카와 유지는 이 조약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후적 맥락에서 이 조약이 우크라이나사의 전환점이 돼 러시아에 병합되는 과정의 첫걸음이 됐다.” 러시아는 이 협정 이후 차르의 칭호를 ‘전(全) 러시아의 차르’에서 ‘모든 대러시아(러시아) 및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의 차르’로 바꾼다.

그러나 러시아는 협정 2년 만에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우크라이나를 분점했다. 흐멜니츠키는 차르에게 협정 위반을 비난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수도 키예프를 따라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좌안은 폴란드가, 우안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이후 독립선언을 이어갔지만 실질적인 독립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가능했다. 1930년대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 실패가 유발한 대기근의 와중에 무수한 목숨이 사라졌다. 300만명으로 추산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최대 1000만명이 숨졌다고 본다. 소련의 수탈로 대기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서부 지역의 반(反)러시아 정서는 강화됐다.

쉐겔 교수는 “우리는 유럽식 국가를 세우고 싶기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상징하는 부패·전체주의와 결별하고 싶다”고 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페레야슬라프 협정

우크라이나 민족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1654년 페레야슬라프에서 폴란드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모스크바 공국)와 동맹을 맺은 조약.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단기적 군사 동맹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이 조약에 ‘우크라이나인은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