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대통령 건강 정보 공개의 업보

감투봉 2016. 11. 24. 11:12

[전문기자 칼럼] 대통령 건강 정보 공개의 업보

김동섭 보건복지 전문기자

2004년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HO(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했다. 연설을 마치고 경호원과 은밀하게 총회장을 빠져나가는 김 전 대통령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이젠 비밀도 아니지만 당시 80세 고령인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대퇴부 염좌'를 앓았고, 퇴임 직전 신장이 나빠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는 진단도 받았다고 한다(이희호 회고록). 그 장면을 보며 재임 중에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달랐다. 해외 순방을 마치면 청와대는 대통령의 건강 정보를 거리낌없이 브리핑하곤 했다. 작년 4월엔 '만성피로에 위경련, 복통, 인두염, 미열' '건강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며 '서울 모처에서 검진받았다'는 사실까지 공개했다. 2급 비밀인 대통령 건강까지 공개한 것에 대해 '링거 투혼' 등이 대통령의 지지율을 높일 것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앞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사실 박 대통령은 60대 중반이지만 얼굴과 목에 주름살이 없어 늘 젊음을 유지하는 묘약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작용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대통령은 '세월호가 침몰하던 7시간'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성형수술' '보톡스 시술' 등 의혹이 제기됐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개인 병원에서 주사제를 불법으로 대리 처방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비타민·태반·백옥·마늘 주사를 맞은 것이다. 대통령 선거 열기가 뜨겁던 2012년 11~12월에 6번, 취임하기 직전인 이듬해 1~2월에도 10번, 취임 후 2013~ 2014년 11번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복지부 조사 결과도 나왔다. 청와대가 이런 약품을 구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이 약들은 효능이 검증되지 않아 대학병원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서울 강남구 차움의원 모습. 차움의원은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주사제를 대리 처방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뉴시스
문제는 최순실이 자신의 단골 병원 의사를 통해 대통령의 건강까지 '비선'으로 간여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국가기관이다. 마땅히 주치의 확인을 통해 진료받고 처방받아야 한다.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고 정치·경제적 충격파가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09년 12월 주치의에게 심각한 폐질환을 진단받았다. 그는 부속실 직원도 눈치채지 못하게 약을 비타민이라고 둘러댔다. 안색이 환자처럼 보일까 봐 부인 김윤옥 여사의 화장품을 썼다고 한다. 연설 때도 3분마다 한 번씩 나오는 기침이 멈출 수 있도록 주치의가 조치를 취했다. 입맛이 떨어지고 약에 취해 몹시 힘들었다는 6개월 동안 천안함 폭침이라는 국가 위기에도 대처해야 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쳐도 걱정하는 말이나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대통령이 자신만만해야 공직자도, 국민도 믿고 따라올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은 이제 검찰 수사 선상에까지 올랐다. 대통령의 진료 현황은 더는 숨길 곳도 없는 상황이다. 영양 주사 부작용인 가려움증이 나타났다는 등 마땅히 개인 정보로 보호되어야 할 진료 기록까지 마구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고 항변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다. 비선이라는 잘못된 약을 쓴 것의 업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