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최순실이 좌절케 한 女性들

감투봉 2016. 11. 26. 08:47

[기자의 시각] 최순실이 좌절케 한 女性들

 

 

손진석 경제부 기자

새벽에 세종시에 내려가려고 역(驛)에 가는 택시를 탔다. 운전사가 쉰 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자식 자랑이 나왔다. "딸이 공부를 잘한 건 아니었어요. 아직 정규직도 아니고요. 그래도 대학 나와 2년 계약직으로 일하더니 제법 돈을 모았나 봐요. 엄마랑 같이 해외여행 가자며 여행사에 예약을 했다네요. 그런데요…."

순간 그녀가 다음에 어떤 말을 이어갈지 느낌이 왔다. "최순실 있잖아요. 그 여자가 저처럼 새벽부터 일하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자수성가한 것도 아니고, 잘 배운 것 같지도 않고요. 말 타고 이대 들어간 그 아이도 우리 딸보다 뭐가 나은지 모르겠어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과거의 권력 비리들과 사뭇 다르다. 대통령 아들이나 정치인이 주연(主演)이던 '남정네들의 비리'와 달리 스토리 중심에 비(非)상식적인 모녀(母女)가 등장한다. 손에 때를 묻혀보지 않은 중년 여성이 불로소득으로 수백억원대 재산을 움켜쥐고, 그 딸은 고3 때 학교에 한 달만 나가고도 명문대에 들어간 '초현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분노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여성을 자주 본다. 이발하러 갔더니 미용실 여주인은 "(최순실은) 고생해 본 흔적도 없는데 나는 조그만 가게 해서 겨우 먹고사니까 속에서 열불이 난다"고 했다.

우리는 OECD에서 남녀 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에 살고 있다. 남성이 100만원 벌 때 여성은 63만원밖에 못 번다. 기혼 여성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견디며 자식들 사교육비 대느라 사투(死鬪)를 벌인다. 대학을 갓 마친 젊은 여성들은 취업 시장에서 좌절을 맛보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길거리 집회에 여성들이 대거 쏟아져 나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저(低)성장 터널의 입구에 서서 곧 들어가게 될 그곳의 내부가 보이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다. 터널 밖 하늘도 어둡기 그지없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미국발(發) 물가 상승의 물결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국내 은행들은 대출금리를 서둘러 올리고 있지만, 5분기 연속 실질임금 성장률은 마이너스 행진 중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여성이 일하기 편하고 아이를 마음 놓고 낳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점이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년부터 찾아올 생산 가능 인구 감소세에 맞서고, 사회 전반의 활력을 제고하 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터진 최순실 사태는 여성들의 자활(自活) 의지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악재(惡材)가 되고 있다.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 좌절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사회 정의의 측면뿐 아니라 공동체가 먹고살기 위한 차원에서도 '제2의 최순실'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국가적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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