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아침 편지] 63년 만에 미국서 받은 6·25 훈장

감투봉 2017. 1. 12. 08:03

이중희 재미 과학자

이중희 재미 과학자
지난해 6월 27일 미국에 있는 사무실로 한국에서 소포가 왔다. 내 이름을 영어로 적었는데 철자가 너무 달라서 미국인 비서가 반송하려다가 내게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었다. 한글 이름도 적혀 있었는데 내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이 LA 총영사관을 통해 보내온 것이다. 뜯어 보니 '국가보훈영웅' 증서와 감사 편지, 그리고 목에 거는 큰 훈장이 있었다. 뜻밖의 일이라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라도 나를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 이틀 전에는 헬스클럽에서 만나서 친해진 6·25 참전 미군 용사 둘에게 전쟁 66주년을 맞아 좋은 식당에 데려가 점심을 대접했다. 한 사람은 미 해병대 하사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또 한 사람은 육군 항공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10대 학생이었다. 징병 의무는 없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올려서 입대했다. 그 후 이른바 '소모품 소위'로 보병 수도사단 최전방에서 매일 죽고 죽이고 뺏고 뺏기는 전투를 거듭했다. 적에게 포위돼 밤새 전투하고 나니 산 전체가 아군과 적군 시체로 뒤덮이기도 했다. 주먹밥을 들고 뛰어오던 병사가 죽어 며칠씩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풀이고 나무뿌리고 아무것이나 뜯어 먹으며 견뎌냈다. 몇 개월씩 이렇게 전투하다 보면 남은 것이라곤 다 찢어진 피투성이 군복, 적탄에 맞아 구멍 뚫린 철모, 상처투성이인 몸, 몇 발 안 남은 총알, 그리고 가슴에 걸린 수류탄 하나가 전부였다.
1951년 2월24일 38선 북방의 원산만 앞에 있는 섬인 신도에 대한민국 해병대원들을 태운 미 해군 상륙정이 접근하는 모습.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1952년 어느 날, 사단 전체가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적의 폭격으로 통신은 다 끊기고 곧 다가올 육박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차피 죽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끼고 안 먹던 물통을 사병들에게 내주며 "한 모금씩 마시라"고 했는데 그들은 입만 적시고는 나에게 "소위님" 하며 돌려주었다. 그 전투에서 적의 칼에 찔려 피 흘리며 "소위님, 나 좀" 하며 신음하면서 구해달라던 권 하사를 두고 혼자 빠져나와 지금도 큰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너무 배고프고 지쳐서 그를 끌 힘이 없었다. 의정부에서 생존 장병들이 재집결했는데 한국의 대통령,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은 보이지 않고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찾아와 함께 울며 우리를 위로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제대할 때 받은 것은 광목 한 장이 전부였다. 전후에 나는 시험을 쳐서 어느 국영기업에 입사했다. 신문 광고에서 본 응모 자격에는 '공대 졸업자로서 병역 필자'라고 했는데, 들어가 보니 합격한 14명 가운데 고등학교를 안 나온 몇 명과 군필 4명 빼고는 전부 병역 기피자였다. 이런 부패를 불평한 죄로 정부는 내게 어이없게도 '병역 기피자'라는 누명을 씌워 파면했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최전방에서 죽음과 마주 섰던 사람인데…. 그 뒤 긴 세월, 분했지만 한국 정부가 이제라도 내게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왔다.

모두 지나간 얘기이다. 전쟁이 끝나고 63년이나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나에게 '국가보훈영웅'이라는 칭호를 준 한국 정부가 진심으로 고맙다. 오늘의 정부는 옛날과 다름을 알게 됐다. 그 전쟁에서 나처럼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해 고생한 이 가운데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궁금하다. 한국군뿐 아니라, 세계 16국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한 장병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해주었으면 한다.